Saturday, November 18, 2023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2023/11/18

1. 요약

한 농부의 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는 구두장이 세몬은 그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살고 있는 구두장이는 긴 겨울을 날 새 외투를 만들 양가죽을 사러 자신에게 외상이 있는 마을 농부들에게 돈을 받으러 나갔다가 돈은 받지 못하고 그 대신 교회 모퉁이에 웅크리고 있던 벌거벗은 청년을 만나게 된다.

순간 무서워서 청년을 그냥 두고 오려고 했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껴 아내의 옷을 입혀 집으로 데려오고, 세몬의 아내 마트료나는 수금도 해오지 못하고 오히려 거지에게 자신의 외투를 입혀 집으로 데리고 온 남편에게 극대노를 하며 그 젊은이도 내쫓으려 한다. 그러나 남편 세몬이 하나님께서 이 젊은이를 구하러 자신을 보낸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에 청년을 다시 보는 순간 마트료나의 마음이 풀리게 되고 가여운 생각마저 들게 된다. 이 때 이 청년은 첫 번째 미소를 짓는다.

청년의 이름은 미하엘. 미하엘은 세몬에게 구두수선을 배우고 함께 지낸 지 1년이 흘렀고 그의 솜씨는 이제 마을에 소문이 나서 수입이 날로 늘 정도로 훌륭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몸집이 크고 단단해 보이는 돈이 많은 신사가 방문하여 1년을 신어도 닳지 않는 튼튼한 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한다. 그런데 그 때 미하일은 두 번째 미소를 짓는다.

신사가 떠나고 미하일은 장화가 아닌 슬리퍼를 만들게 되고 그것을 알게 된 세몬이 미하일을 다그치려는 순간 그 신사의 하인이 와서 자기의 주인이 집에 가는 동안 죽었으니 장화가 아닌 슬리퍼를 빨리 만들어 달라고 한다. 그래서 미하일은 이미 만들어두었던 슬리퍼를 하인에게 건네준다.

세월이 흘러 6년이 된 어느날 말쑥하게 차려입은 부인이 쌍둥이 여자 아이 둘과 함께 구두장이 집을 방문하여 두 아이를 위한 구두를 주문한다. 쌍둥이 중 한 아이는 다리를 절었다. 세몬이 치수를 재는 동안 한 아이가 다리를 저는 이유를 부인에게 묻자 자신은 아이들의 엄마가 아니며 아이들의 부모는 6년 전에 죽었다고 얘기한다. 아이들의 아빠는 아이들이 태어나기 사흘 전에 나무에 깔려 죽었고 엄마는 혼자 애를 낳다가 죽었는데, 당시 마을에 젖먹이를 키우던 부인이 고아가 된 쌍둥이도 맡아 키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부인의 아이는 두 살때 세상을 떠나서 이제는 맡아 키우던 쌍둥이 둘만 자신의 곁에 남아있고 이 아이들이 자신의 삶의 낙이라고 사랑스럽게 아이들을 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 때 미하일은 세 번째 미소를 짓는다.

마하일이 세 번째 미소를 짓고 나서 하나님께서 미하일에게 주신 질문인 세 가지 진리의 답을 알게 된 미하일은 세몬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과 왜 세 번 웃었는지까지 모든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고 다시 하늘나라로 떠난다.


2. 세 가지 진리에 대한 고찰

세 가지 진리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이 있다 - 미하일을 추운 밖으로 내쫓으려 했던 마트료나가 하나님 얘기를 듣고 태도가 바뀌어 저녁을 차려주던 모습에서 발견함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 사람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능력이 허락되지 않았다. - 자신의 죽음을 모르고 1년을 준비하려고 했던 신사의 모습에서 발견함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사람은 자신을 위한 염려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는 사랑으로 산다 - 부모 잃은 쌍둥이를 보살피고 키운 이웃의 한 여인의 모습에서 발견함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들이 잘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또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떨어져 사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각자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능력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함게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염려하고 돌봄으로 살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오직 사랑으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3. 느낀 점

톨스토이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삶인지를.

그러나 지금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이든 비크리스천이든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면 그 당시 톨스토이가 얼마나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사람의 마음 속에 사랑이 있다는 관점에서

크리스찬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신자의 본분이라는 것을 배웠고 실천하려고 애쓰며 살고 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을 많은 크리스찬들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물어본다면 교회에서 맡은 일, 직분 등을 열심히 순종하여 일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헌금 잘 드리고, 주일 성수하고 등등 일종의 교회의 생활규범적인 이야기만 하는 분들이 많다.

물론 그것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며 그런 것들도 매우 중요한 신앙생활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부분이 너무 강조되고 치우치다보면 어느 순간에는 바리새인의 모습을 닮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즉 그런 규범에 매어 있다보면 다른 주변 사람들이 소홀히 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 예로 교회에서 맡은 일을 열심히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사정은 배려하지 않는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강조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순종을 강요하기도 한다. 새벽기도를 나가는 것이 마치 신앙의 척도인 것처럼 그 중요성을 피력하며 은연 중에 새벽기도를 나가지 않는 것은 믿음이 덜 성숙되었고 신앙성숙이 될 수 없는 것인 양 재단한다. 헌금 드리는 것이 신앙의 기준인 것처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을 들이대며 말씀의 회초리를 휘두른다. - 헌금에 대해서는 이 외에도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는 이정도로...  지금 새벽기도 설교 내용이 욥기 말씀이지만 다른 사람의 고난에 대해서도 인과응보의 하나님만을 하나님의 전부인 양 주변을 살펴보고 기도하라고 조언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화의 상승작용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정과 교회에서 종종 말씀으로 실족하게 하는 부작용들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자신이 하나님과의 소중한 관계를 위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현상은 자신의 믿음을 합리화하는 방법으로 사용되곤 했다.

이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벌거벗은 젊은이를 내쫓으려다가 하나님 얘기를 듣고서는 젊은이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긴 마트료나. 그 순간 악마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로 전환이 된다.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던 마트료나는 마음 속의 하나님의 사랑이 움직여서 그 젊은이를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사랑의 마음으로 그를 대접하게 된 것이다. 마트료나는 하나님을 사랑으로 대했다고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알지 못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방법을 주신 것이다. 즉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선 나 외에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사람은 절대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혼자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아담에게 하와를 주신 것, 그리고 가정을 꾸리게 하신 것, 이웃을 주시고 공동체를 주신 것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주신 것이고 그 방법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것도 인간을 통해 사랑을 베푸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마트료나를 통해 젊은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처럼.


인간은 미래를 볼 수 없다는 관점에서

미래를 볼 수 없으므로 미래의 염려는 어떻게 보면 무의미한 것일 수 있고 그러므로 인간은 현재 삶에서 최선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다. (정진부 목사님께로부터 발췌)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거한다는 관점에서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품 속에 있는 자이다. 아득한 옛날 연애 시절을 떠올려보면 내가 결혼 전 아내를 사랑할 때 난 아내의 품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하는 대상의 품 안에서 기쁨과 안전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품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은 바로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얘기한다. 그래서 사랑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 안에 거하시게 되는 것이다. 



3. 나의 적용

To be continued...



4. 실천 방법



성경적 관점과 크리스천의 관점으로 해석한 내용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아래 정진부 목사님의 블로그에서 좀 더 깊은 내용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정진부 목사님 post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Thursday, November 9, 2023

[새벽기도] 2023년 11월 9일 욥기 6장 1절-30절

 

욥기 6장 1절-30절

황주성 목사

1. 설교 내용

욥은 난 너무 아프다라고 말하는데 엘리바스는 너는 틀렸다라고 말하고 있다.

욥은 고통의 문제로 시름하고 있는데 엘리바스는 옳고 그름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예시) 십일조를 하면 정답이고 하지 않으면 오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십일조를 하는 순간 엘리바스가 된다. 십일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아픔과 형편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정답과 오답을 미리 판단해 놓았기 때문이다. 정답과 오답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삶의 고통의 문제들, 수많은 영역들을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한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태도에 비추어볼 수 있다.

소망이 없는 세상을 향해 너희는 틀렸다라고 말한다. 욥과 같이 아파하는 세상을 향해 너희는 틀렸고, 그것은 죄이고 지옥간다고 얘기한다. 교회가 세상의 고통에 무책임하고 무관심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맞는 말이지만 고통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는 쓸모없는 말이다.

바리새인이 바로 정답을 주려고 하는 공동체였다. 정답과 오답을 가르는 데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오답으로 규정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

우리는 정답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변칙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교회는 정답과 오답을 결정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수많은 일들에 대해서 이미 정답과 오답을 결정해 놓고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사람은 이래서 안되고, 저 사람은 예전에 이런 일을 해서 안되고,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은 이래서 안되고, 이런 신학적 사고는 이래서 틀렸고, 이것은 분명 죄이므로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지옥갈 것이고, 이런 식으로 정답과 오답을 정해서 사람들의 고통의 신음을 미리 들어보기도 전에, 어떤 대화를 시도해 보기도 전에 내 마음 속에서 이미 차단이 되고 우리의 사고가 굳어지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정답과 오답의 개념으로 접근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정답으로 여겨졌던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하시고, 오답으로 여겨졌던 사람들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섬기셨다.

2. 느낀 점

옳고 그름, 정답과 오답을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데, 나는 내가 하나님을 제끼고 오히려 사람들의 재판관이 되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재판하시는 유일한 재판관이시지만 그분의 긍휼의 마음으로 오답인 나를 범죄자의 그룹에서 제하여 주셨다.

세상의 일들을 내가 재판할 것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행동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의 고통을 동감하고 이해하려고 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