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ugust 3, 2024

 2024년 8월 3일



교회는 성도에게 전천후의 일을 하기를 원한다. 교회 오래 다녔으니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오래 다닌만큼 믿음도 커졌으니 이것 저것 모두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많은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을 맡겨 놓으면 책임감 있게 한다. 나의 이런 성향에 교회일도 맞추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질그릇으로 만드셨고 질그릇에 합당한 자리에서 열심히 순종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한다. 질그릇이 금그릇이 될 수 없는데 나에게 금그릇의 일을 하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질그릇을 금그릇으로 못만드시는 분은 아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값으로 세운 교회를 사랑하라고 하시지 교회의 시스템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지금 교회는 시스템이 이미 복잡하고 점점 복잡해진다. 시스템이 복잡할 수록 할 일이 많아지는데 그 일을 할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교회 수가 늘어도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몇 되지 않는다. 그 몇 안되는 사람들이 교회의 시스템을 떠 받쳐야 하는 불합리 속에 있다. 여러 부서에서 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의 역할이라도 좀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닌가?

하나님은 효율성을 중시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중시하신다. 일이 시스템적으로 제대로 돌아가고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좀 늦더라도 좀 삐걱거리더라도 한 영혼이 하나님께서 돌아온다면 그것이 더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선 것 같다. 그래서 나같은 믿음이 열라 부족한 사람에게 선교 기도회 팀장을 맡기시고 순장을 맡기시는 것 아닌가? 나같은 사람 보다는 좀 더 영성이 좋고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사람들에게 이 일을 맡기지 않으시고 나한테 맡긴 것은 효율성은 떨어지더라도 나 같은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닐까? 기도의 응답도 우리가 원하는 시점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잘 없다. 내가 좀 뜬금없다고 느껴진 순간 예전의 기도가 응답된 것이 종종 있었다. 타이밍이 좀 안맞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세상의 지혜자들은 인생의 타이밍과 선택, 준비성, 열심 등으로 인생을 좀 더 가치있고 보람되고 성공하는 길로 가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성공의 길로 인도하지 않으신다. 실패와 좌절의 길로, 패배의 길로, 모자란 길로, 가난한 길로 이끄신다. 그것으로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교회의 일은 많고 난 좀 지쳤고 기쁘지 않고 회의감이 들고 관계도 어려워지고 있다. 더 이상 이렇게 갈 수는 없다. 모든 것을 내려놓더라도 예수님 안에서의 기쁨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Friday, April 19, 2024

신명기 30장 1절-20절

1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4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적군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를 내리게 하시리니

8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9-10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1)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황주성 목사

1. 설교 내용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또는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는지 하는 것은 보이는 문제가 아니다.

단지 보이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서 나오는 결과,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 명령을 지키는 삶이다.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에 생명과 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께 생명과 복이 있다.

그러므로 보이는 어떤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를 잘 한다고 해서 그 자체가 생명과 복은 아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비슷할 수 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명령을 지켜 행하는 삶.

겉으로 드러나는 순종의 모습을 따라하는 삶, 열심히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삶은 자기자신을 속일 정도로 아주 비슷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드러나는 모습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항상 점검해야 한다.

신 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마음에 할례를 베푸실 때 그 할례가 무엇으로 이끌어지는지 잘 확인해야 한다.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 할례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신 후 가장 먼저 그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셨다.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이 돌이켜지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신자의 삶의 축소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역사하신다면 때로는 우리의 삶을 흔드신다면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을 더 편하게 하거나 우리의 형편을 더 낫게 해 주시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돌이켜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지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생명과 복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신자에게 있어서 참 중요한 지혜이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우리의 삶의 형편과 처지의 어떠함이나 또는 우리의 신앙생활과 사역의 어떠함보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마음을 쏟고 살아가야 한다.





2. 느낀 점




Monday, April 1, 2024

창조설계의 비밀(1) - 흰 가운을 입은 과학자 VS. 검은 가운을 입은 성직자



1. 요약

1974년 시카고 트리뷴의 신참기자였던 저자(Lee Strobel)는 웨스트버지니아 찰스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맡게 된다. 그 사건은 교과서에 불만을 품은 마을 사람들이 총과 폭탄으로 테러를 하고 집회를 열며,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며, 심지어 석탄광부들까지도 파업의 대열에 동참하여 지역 경제의 문제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교과서의 내용으로 인해 지역사회는 교과서를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는 등 갈등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 갈등의 주요 원인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의 내용이 기독교 가치관을 훼손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신앙의 가치관에 기반을 둔 목회자들과 가족들, 학부모들과 마을 사람들은 극도의 분노에 휩싸여 교과서를 반기독교적인 도서로 규정하고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비기독교인들이나 사회주의 운동가와 같은 진보주의 성향의 사람들은 이 교과서들이 바로 미국의 진정한 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우리는 모든 목소리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무신론자였던 기자는 단번에 좋은 기삿감이 될 것을 눈치채고 즉시 문제의 동네로 내려간다. 그렇게 찰스턴 시내에 도착한 저자는 교과서를 반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집회정보를 입수하고, 사진기자 챨리와 그 집회에 비밀리에 잠입하여 이 이상한 사건을 좀 더 정확하게 파헤쳐 보기로 한다.

그러나 이들의 비밀잠입은 집회 시작과 함께 바로 들통이 나고 성난 군중 앞으로 끌려나오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직면하지만 전도사인 듯한 남자의 도움으로 공정한 기사를 쓰겠다고 군중들과 약속하고는 인터뷰의 허락을 받게 된다.

집회의 내용은, 마을 사람들의 불만이 되는 교과서들 중 하나를 소개하며 반기독교적인 내용임을 강조하고 이러한 반기독교적인 교과서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명목으로 한 주 더 등교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지속적인 싸움을 위한 모금도 이어졌으며 싸움의 승리를 다짐하는 내용이었다.

집회가 끝난 후 저자는 "바이블벨트 카운티에서 벌어진 교과서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1면 머리기사를 실으며 소정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공평하고 균형있는 기사를 쓰려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기사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또한 저자는 그 집회를 통해 기독교는 모래에서 머리를 빼내지 않는 거대한 공룡의 모습이며, 하나님이 설 자리는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기독교인들은 왜 인정하지 못하는지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한다.

이렇듯 저자는 웨스트버지니아의 분쟁은 신앙이 스스로 자멸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결과라고 단정하고 있다. 철통같은 진화의 증거를 통해 예수의 기적은 미신에 불과하고, 궁극적으로 과학이 우주의 모든것을 설명하게 될 것이며 그날은 이미 다가와 있다고 믿고 있다.

아래는 저자가 진화론에서 직관적으로 알았던 내용을, 코넬 대학의 저명한 진화생물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윌리엄 프로바인"이 명백하게 밝혀 정리한 "다윈주의가 옳다면 피할 수 없는 5가지 결론에 도달한다"는 내용에서 그 5가지 결론을 서술한다.

1) 신이 존재하는 증거는 없다.

2) 사후 생명은 없다.

3) 윤리의 절대적 토대는 없다.

4) 삶의 궁극적 의미는 없다.

5)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의지란 없다.


2. 느낀 점 - 책의 챕터 마지막에 있는 질문들에 대한 답변으로 느낀 점을 서술하고자 한다.

1) 과거의 저자처럼 기독교에 적대적인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가? 그 사람이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의 태도 중에서 개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인가?

기독교인인 나에게 적대적으로 대하지는 않았지만 반기독교적인 지식과 진화론의 지식에 대해 해박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항상 책을 아주 많이 읽었었는데 비그리스도인 이었기도 했지만, 그의 독서와 탐구의 지식으로 기독교인들을 망신 주고 논쟁에서 이기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15년도 더 된 일이다. 그 친구와 진화론의 일부분으로 논쟁이 붙은 적이 있었다. 논쟁의 핵심은 인간이 진화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그 논리를 맞받아치기 위한 나의 질문은 '진화가 사실이라면 현재의 원숭이나 침팬치들도 긴 시간이 지나면 인간으로 진화할 수도 있느냐? 그리고 원숭이 또는 침팬치와 인간의 중간 정도의 종은 왜 현재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 그 친구는 다윈의 진화나무(생물계통수)를 언급하면서 "현재의 원숭이와 침팬치는 오래전 같은 조상에서 시작했지만 그 갈래가 갈라져 현재는 전혀 다른 종으로 분화되면서 더 이상 인간처럼 진화할 수 없고 원숭이와 침팬치의 종으로서 계속 진화를 계속해 나간다"라고 대답한 것 같다. 당시 나는 진화론을 그냥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수준 정도만 알고 있었고, 또한 성경에서 얘기하는 창조론조차도 무작정 믿는 정도이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수준이었으므로 (교회에서조차 창조론을 믿는 대상으로만 여겼지 자세하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 친구에게는 그 이상의 얘기를 꺼낼 수도 없이 무안하게 논쟁을 서둘러 마무리해야 했다.

저자의 생각과 관념 또한 내가 언급했던 그 친구와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고 여러 기적들을 일으켰다는 성경의 말씀을 그냥 허구와 종교적인 신념으로 정의해 버리고, 과학이야말로 증명된 진리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이 저자의 생각을 더욱 더 단단하게 해주는 것이 있다. 바로 기독교인들의 반응이다. 찰스턴의 마을 사람들도 '성경의 말씀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지문이 세상 도처에 있음을 절대 확신한다', '우리는 흙덩이에서 진화된 존재가 아니다' 등 진화론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신앙적 믿음을 성경을 앞세우며 진리라고 막연히 주장하기에 급급하다. 이러한 행동과 말이 진화론자들에게는 그저 흩어지는 구름을 잡는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보였을 것이다.


2) 당신은 기독교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가? 기독교의 신빙성에 대해 1(전혀 믿을 수 없다)부터 10(절대 믿을 수 있다)까지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이나 주겠는가? 당신의 견해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세월이 지나면서 당신의 견해는 달라졌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달라졌으며 그 계기는 무엇인가?

'기독교의 신빙성'이 무엇에 대한 신빙성을 의미하는지 자세한 내용이 질문에는 없다. 찰스턴 마을 사람들이 믿고 있는 그러한 막연한 신빙성을 의미하는지, 창조과정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없는 성경에 대한 신빙성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온 우주와 생명과 인간은 오로지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에 10인 절대 믿을 수 있다의 점수를 준다.

누가 창조하셨는가 하는 견해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하는 견해는 조금 달라졌다. 내가 어릴 때부터 젊을 때까지는 (한 30대 중반까지) 창조의 방법이 성경의 문자 그대로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제외한 우주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인간은 도자기 만들듯이 흙을 직접 하나님의 손으로 빚으셔서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내용을 그대로 믿었다. 좀 더 전문성있는 설명으로 종(species) 내부의 소진화(micro-evolution)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창1:25)

그런데 이러한 나의 생각은 조금 변화했다. 현재의 믿음은 종 안에서의 소진화는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여기서 소진화 즉 진화라고 얘기했지만 아직도 나의 소심한 입장은 진화라는 표현보다는 변화(change) 또는 변이(mutation)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 이유를 예를 들면, 애완견의 경우 오래전 들개로부터 사람들이 교배를 통해 예쁘게 만들고, 털이 부드럽게 또는 북실하게 만든 것처럼 사람의 기호에 맞게 다양한 형태의 강아지를 만들어내 왔다. 외모적인 면에서는 진화라고 해야 할 듯하나 대부분 알고 있듯이 순종의 경우 질병에 취약하고 대부분 유전병이 있다. 이런 면에서는 역진화라는 표현이 어울릴 듯 하다. 그렇게 변해온 애완견들은 여전히 같은 종으로서 어느 애완견과도 교배가 가능하고 심지어 같은 종인 들개와도 교배가 가능하다. 즉 개라는 종의 속성은 변하지 않았다. 개의 유전자 안에서 특정 유전자를 발달시켜 온 것이다. 그만큼 다른 유전자의 쇠퇴를 가져오게 된다. 그것이 필요한 유전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예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같은 단순한 세포들의 변이는 인간의 개입이 없이도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인간의 자연파괴가 한 몫을 했겠지만 인간에게 치명적인 세균으로 변이를 하여 세계인구를 조절했던 전례도 많이 있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진화라고 보기에는 좀 억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 박테리아의 진화를 내성을 가진 박테리아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내성을 가진 박테리아는 항생제의 출연에 의해 박테리아 스스로 자신의 시스템을 변형시킨 결과이지 진화의 결과는 아니다. 그리고 자연상태에서의 자연선택은 내성을 가진 균주를 제거하는 경향으로 작동하지만, 내성을 가진 박테리아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그만큼 항생제를 많이 만들어낸 결과로 항생제가 많이 있는 환경에서 살아남아 선택되는 것이다.)


3) 기독교는 현대 과학 앞에서 악화되었는가 강화되었는가? 그런 평가를 내린 근거는 무엇인가?

점점 악화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아래 내가 이해한 근거에 대해 기술해본다.

- 교회 내에서 진화와 창조에 대해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여전히 지지하므로, 약간의 색다른 의견조차 이단으로 정죄될 수 있는 두려움으로 인해 활발히 개진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진화의 내용에 대해 교회가 합리적인 대답을 해 주지 못한다.

- 진화론이 1800년 중반(1859년 종의 기원)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1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는 반면, 창조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1960년대부터 시작하여 이제 60년이 조금 넘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 교회 또는 기독교계 내부에서조차 창조의 방법에 대해 진화론을 일부 또는 상당량 수용하는 등의 일관된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 현대에는 과학은 진화론이고 무신론의 증거가 된다고 굳게 믿는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는 그동안 기독교가 과학을 버리고 부정함으로써 신앙을 더욱 강조하려는 이른바 맹신을 강요한 탓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교회의 목사들이 권위를 강조하여 신자들의 궁금증을 믿음이 부족하다는 명목으로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결국 맹신과 순응하는 신자들만을 양성한 결과이다. 이렇듯 과학의 이해와 지적인 토대의 결여로 무신론자의 공격에 쉽사리 무너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것은 무신론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하나씩 발견하고 그 창조과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과학으로 인해 오히려 인간은 창조자 하나님께 겸손해질 수 있고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과학은 하나님께서 하나의 도구로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선물이자 능력인 것인데, 이것을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등한시해 온 기독교가 과학은 무신론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신학자와 목사의 지적 백그라운드도 과학의 무신론에 한 몫 했다고 생각한다.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15, 16세기 위대한 과학자들은 신학자의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위대한 수학자 파스칼,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이 그랬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신학은 과학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다윈시대가 도래한 18세기경부터가 아니었을까? 어쨌든 20세기 이후에는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들보다 인문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좀 더 목회자나 성경학자가 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아 성경을 인문적으로 해석하는 시도와 경험은 오래된 반면 자연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극히 드물었다고 생각된다. 


4) 코넬 대학의 역사학, 생물학 교수인 윌리엄 프로바인은 "다윈주의가 옳다면 다섯가지 결론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가 내린 결론 중 당신에게 가장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윌리엄 프로바인의 5가지 결론은 다윈주의가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주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내린 첫번째 결론인 "신이 존재하는 증거는 없다"가 나머지 4가지 결론을 이끌고 있으며 명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신의 존재의 부정은 결국 우주와 생명은 "우연"이라는 사건을 통해 발생되고 진행되어진다는 것이므로 우연으로부터 시작한 사건의 진행은 목적이 없다. 물질로만 모든 것이 설명되어야 하므로 사후세계나 영적인 세계는 당연히 존재해서는 안된다. 물질이나 생명은 우연으로 발생하고 진행되지만 자연선택의 원리로 상황 속에서 강한 자만이 살아남아야 멸종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다. 이 자연선택의 원리 속에서 유기체는 점차 강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했으며 세포는 복잡해지고 점점 늘어나서 인간으로까지 형태가 발전하게 되었다. 복잡해지는 만큼 처리해야 할 정보량은 점차 늘어나게 되므로 그 정보량을 처리해야 할 "뇌"라는 조직이 발생이 되었고 그 뇌 자체도 점점 복잡하게 되어 뇌를 구성하는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구성이 유전자, 호르몬, 뉴런 등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정보를 처리하고 그에 따른 명령체계를 구성한다. 즉 동물이나 인간이 생각하고 반응하는 모든 것들이 뇌 안의 물리화학적인 방법으로 정보와 명령을 처리하는 결과라는 것이다. 고도로 발달한 지능일수록 집단 또는 사회를 이루어서 살아가는 것이 개인 혼자 살아가는 것보다 강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이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도록 질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사회 속에서 종족의 계승과 번식을 더 원활하게 하기 위한 안정적인 보호장치가 "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윤리는 뇌의 유전자 속에 상주하여 자손에게 계승된다. 따라서 인간의 선택 또한 뇌 안에서 유전자, 호르몬 등의 물리적 화학적 작용을 통해 일종의 알고리즘적으로 동작하며 자신과 사회를 보호하고 발전되도록 작용하는 것이다. 결국 진화 알고리즘이 유전자에 코딩되어 생명을 지속하고 종족을 이어가기 위해 선택이라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지 자유 의지의 반영이 아니다.



Saturday, November 18, 2023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2023/11/18

1. 요약

한 농부의 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는 구두장이 세몬은 그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살고 있는 구두장이는 긴 겨울을 날 새 외투를 만들 양가죽을 사러 자신에게 외상이 있는 마을 농부들에게 돈을 받으러 나갔다가 돈은 받지 못하고 그 대신 교회 모퉁이에 웅크리고 있던 벌거벗은 청년을 만나게 된다.

순간 무서워서 청년을 그냥 두고 오려고 했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껴 아내의 옷을 입혀 집으로 데려오고, 세몬의 아내 마트료나는 수금도 해오지 못하고 오히려 거지에게 자신의 외투를 입혀 집으로 데리고 온 남편에게 극대노를 하며 그 젊은이도 내쫓으려 한다. 그러나 남편 세몬이 하나님께서 이 젊은이를 구하러 자신을 보낸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에 청년을 다시 보는 순간 마트료나의 마음이 풀리게 되고 가여운 생각마저 들게 된다. 이 때 이 청년은 첫 번째 미소를 짓는다.

청년의 이름은 미하엘. 미하엘은 세몬에게 구두수선을 배우고 함께 지낸 지 1년이 흘렀고 그의 솜씨는 이제 마을에 소문이 나서 수입이 날로 늘 정도로 훌륭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몸집이 크고 단단해 보이는 돈이 많은 신사가 방문하여 1년을 신어도 닳지 않는 튼튼한 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한다. 그런데 그 때 미하일은 두 번째 미소를 짓는다.

신사가 떠나고 미하일은 장화가 아닌 슬리퍼를 만들게 되고 그것을 알게 된 세몬이 미하일을 다그치려는 순간 그 신사의 하인이 와서 자기의 주인이 집에 가는 동안 죽었으니 장화가 아닌 슬리퍼를 빨리 만들어 달라고 한다. 그래서 미하일은 이미 만들어두었던 슬리퍼를 하인에게 건네준다.

세월이 흘러 6년이 된 어느날 말쑥하게 차려입은 부인이 쌍둥이 여자 아이 둘과 함께 구두장이 집을 방문하여 두 아이를 위한 구두를 주문한다. 쌍둥이 중 한 아이는 다리를 절었다. 세몬이 치수를 재는 동안 한 아이가 다리를 저는 이유를 부인에게 묻자 자신은 아이들의 엄마가 아니며 아이들의 부모는 6년 전에 죽었다고 얘기한다. 아이들의 아빠는 아이들이 태어나기 사흘 전에 나무에 깔려 죽었고 엄마는 혼자 애를 낳다가 죽었는데, 당시 마을에 젖먹이를 키우던 부인이 고아가 된 쌍둥이도 맡아 키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부인의 아이는 두 살때 세상을 떠나서 이제는 맡아 키우던 쌍둥이 둘만 자신의 곁에 남아있고 이 아이들이 자신의 삶의 낙이라고 사랑스럽게 아이들을 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 때 미하일은 세 번째 미소를 짓는다.

마하일이 세 번째 미소를 짓고 나서 하나님께서 미하일에게 주신 질문인 세 가지 진리의 답을 알게 된 미하일은 세몬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과 왜 세 번 웃었는지까지 모든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고 다시 하늘나라로 떠난다.


2. 세 가지 진리에 대한 고찰

세 가지 진리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이 있다 - 미하일을 추운 밖으로 내쫓으려 했던 마트료나가 하나님 얘기를 듣고 태도가 바뀌어 저녁을 차려주던 모습에서 발견함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 사람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능력이 허락되지 않았다. - 자신의 죽음을 모르고 1년을 준비하려고 했던 신사의 모습에서 발견함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사람은 자신을 위한 염려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는 사랑으로 산다 - 부모 잃은 쌍둥이를 보살피고 키운 이웃의 한 여인의 모습에서 발견함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들이 잘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또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떨어져 사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각자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능력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함게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염려하고 돌봄으로 살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오직 사랑으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3. 느낀 점

톨스토이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삶인지를.

그러나 지금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이든 비크리스천이든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면 그 당시 톨스토이가 얼마나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사람의 마음 속에 사랑이 있다는 관점에서

크리스찬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신자의 본분이라는 것을 배웠고 실천하려고 애쓰며 살고 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을 많은 크리스찬들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물어본다면 교회에서 맡은 일, 직분 등을 열심히 순종하여 일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헌금 잘 드리고, 주일 성수하고 등등 일종의 교회의 생활규범적인 이야기만 하는 분들이 많다.

물론 그것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며 그런 것들도 매우 중요한 신앙생활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부분이 너무 강조되고 치우치다보면 어느 순간에는 바리새인의 모습을 닮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즉 그런 규범에 매어 있다보면 다른 주변 사람들이 소홀히 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 예로 교회에서 맡은 일을 열심히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사정은 배려하지 않는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강조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순종을 강요하기도 한다. 새벽기도를 나가는 것이 마치 신앙의 척도인 것처럼 그 중요성을 피력하며 은연 중에 새벽기도를 나가지 않는 것은 믿음이 덜 성숙되었고 신앙성숙이 될 수 없는 것인 양 재단한다. 헌금 드리는 것이 신앙의 기준인 것처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을 들이대며 말씀의 회초리를 휘두른다. - 헌금에 대해서는 이 외에도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는 이정도로...  지금 새벽기도 설교 내용이 욥기 말씀이지만 다른 사람의 고난에 대해서도 인과응보의 하나님만을 하나님의 전부인 양 주변을 살펴보고 기도하라고 조언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화의 상승작용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정과 교회에서 종종 말씀으로 실족하게 하는 부작용들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자신이 하나님과의 소중한 관계를 위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현상은 자신의 믿음을 합리화하는 방법으로 사용되곤 했다.

이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벌거벗은 젊은이를 내쫓으려다가 하나님 얘기를 듣고서는 젊은이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긴 마트료나. 그 순간 악마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로 전환이 된다.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던 마트료나는 마음 속의 하나님의 사랑이 움직여서 그 젊은이를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사랑의 마음으로 그를 대접하게 된 것이다. 마트료나는 하나님을 사랑으로 대했다고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알지 못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방법을 주신 것이다. 즉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선 나 외에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사람은 절대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혼자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아담에게 하와를 주신 것, 그리고 가정을 꾸리게 하신 것, 이웃을 주시고 공동체를 주신 것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주신 것이고 그 방법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것도 인간을 통해 사랑을 베푸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마트료나를 통해 젊은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처럼.


인간은 미래를 볼 수 없다는 관점에서

미래를 볼 수 없으므로 미래의 염려는 어떻게 보면 무의미한 것일 수 있고 그러므로 인간은 현재 삶에서 최선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다. (정진부 목사님께로부터 발췌)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거한다는 관점에서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품 속에 있는 자이다. 아득한 옛날 연애 시절을 떠올려보면 내가 결혼 전 아내를 사랑할 때 난 아내의 품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하는 대상의 품 안에서 기쁨과 안전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품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은 바로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얘기한다. 그래서 사랑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 안에 거하시게 되는 것이다. 



3. 나의 적용

To be continued...



4. 실천 방법



성경적 관점과 크리스천의 관점으로 해석한 내용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아래 정진부 목사님의 블로그에서 좀 더 깊은 내용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정진부 목사님 post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Thursday, November 9, 2023

[새벽기도] 2023년 11월 9일 욥기 6장 1절-30절

 

욥기 6장 1절-30절

황주성 목사

1. 설교 내용

욥은 난 너무 아프다라고 말하는데 엘리바스는 너는 틀렸다라고 말하고 있다.

욥은 고통의 문제로 시름하고 있는데 엘리바스는 옳고 그름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예시) 십일조를 하면 정답이고 하지 않으면 오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십일조를 하는 순간 엘리바스가 된다. 십일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아픔과 형편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정답과 오답을 미리 판단해 놓았기 때문이다. 정답과 오답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삶의 고통의 문제들, 수많은 영역들을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한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태도에 비추어볼 수 있다.

소망이 없는 세상을 향해 너희는 틀렸다라고 말한다. 욥과 같이 아파하는 세상을 향해 너희는 틀렸고, 그것은 죄이고 지옥간다고 얘기한다. 교회가 세상의 고통에 무책임하고 무관심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맞는 말이지만 고통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는 쓸모없는 말이다.

바리새인이 바로 정답을 주려고 하는 공동체였다. 정답과 오답을 가르는 데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오답으로 규정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

우리는 정답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변칙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교회는 정답과 오답을 결정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수많은 일들에 대해서 이미 정답과 오답을 결정해 놓고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사람은 이래서 안되고, 저 사람은 예전에 이런 일을 해서 안되고,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은 이래서 안되고, 이런 신학적 사고는 이래서 틀렸고, 이것은 분명 죄이므로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지옥갈 것이고, 이런 식으로 정답과 오답을 정해서 사람들의 고통의 신음을 미리 들어보기도 전에, 어떤 대화를 시도해 보기도 전에 내 마음 속에서 이미 차단이 되고 우리의 사고가 굳어지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정답과 오답의 개념으로 접근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정답으로 여겨졌던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하시고, 오답으로 여겨졌던 사람들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섬기셨다.

2. 느낀 점

옳고 그름, 정답과 오답을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데, 나는 내가 하나님을 제끼고 오히려 사람들의 재판관이 되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재판하시는 유일한 재판관이시지만 그분의 긍휼의 마음으로 오답인 나를 범죄자의 그룹에서 제하여 주셨다.

세상의 일들을 내가 재판할 것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행동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의 고통을 동감하고 이해하려고 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이다.



Wednesday, October 25, 2023

불편한 편의점 - 삼각김밥의 용도

 

1. 요약

사장인 염여사와 편의점 동업을 하며 일하고 있는 오선숙은 그녀의 주변에 있는 남자들 때문에 인생이 고달프다. 그녀의 인생을 고달프게 한 첫 번째 남자는 바로 그녀의 남편. 안정적인 직장을 때려치고 가게를 하다 가출해 버리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지만 선숙의 집요한 잔소리에 다시 가출한 후 생사가 묘연해졌다. 그러한 남편을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다. 다음 두 번째 남자는 바로 그녀의 아들. 대기업에 취직했다가 갑자기 때려치우더니 주식투자로 돈을 날리고 또 영화를 한다고 빚까지 내고 하더니 그게 무산된 후 우울증에 빠져 병원 신세까지 졌다. 선숙은 아들에게 사정하여 외무고시를 준비하게 했지만 그는 여전히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미 두 남자들로 인해 불행해질대로 불행해진 그녀의 인생이건만 노숙자였던 사내가 편의점 야간 알바로 왔다는 걸 안 순간 그녀는 그녀의 인생에 또다시 회오리 바람이 불 것만 같아 불안하다. 그런데 이 독고라는 남자는, 조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게 한다. 사장 언니가 가불해 준 돈으로 외모가 아주 깔끔해졌고 편의점 업무 또한 놀라울 정도록 빠르게 적응해 가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아주 훌륭하게 처리해내고 있다. 이제 이 남자는 선숙이 그녀의 인생에서 이해하지 못할 세 번째 남자로 불쑥 들어와 있게 되었고, 그렇지만 이전 두 남자와는 결이 다른 모습으로 더욱 더 선숙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러던 중 편의점에서 짜몽이라는 비행 청소년의 삼각김밥 절도를 현장에서 붙잡게 되고 약간의 실랑이를 벌이던 중 소년이 던진 삼각김밥에 선숙은 이마를 얻어맞게 된다. 그러나 그 소년이 도망치려는 찰나 독고씨가 나타나 소년을 붙잡게 되고 선숙에게 용서를 빌도록 한 후 소년을 대신해 삼각김밥을 독고씨가 계산하고 나가서 둘이 사이좋게 나눠 먹는다. 이 과정에서 선숙은 안정감과 용서, 그리고 약간의 흥분에 의한 생동감 등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고 완고하기만 했던 그녀 자신에게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음을 느끼게 된다.

이 일 이후 그녀는 독고씨를 대할 때 이전의 불편함보다는 안도감을 더 느끼게 되고, 독고씨의 일하는 모습에서 선숙은 마음이 점점 열리게 된다.

그러나 선숙은 그녀의 아들과는 여전히 녹록치 않다. 외무고시를 준비한답시고 매일 방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는 아들을 선숙은 봐줄 수가 없다. 인내의 한계에 다다른 선숙은 급기야 아들의 방을 두드려 아들과 한바탕 하게 된다. 얘기를 좀 하자는 그녀를 매몰차게 뿌리친 아들이 방문을 꽝 닫아버리고 다시 게임에 몰두해버리자 선숙은 허탈함과 분노에 눈물을 하염없이 흘린다.

다음날 아침 편의점에 출근한 그녀는 독고씨의 인사에 그만 마음이 무너지고 터져나오는 눈물과 함께 아들에 대한 서운함을 봇물처럼 독고씨에게 털어놓는다. 그런 그녀의 하소연을 묵묵이 모두 들어준 독고씨는 자기가 선숙의 얘기를 들어준 것처럼 선숙도 아들의 얘기를 먼저 들어주라고 권한다. 그리고 그 전에 삼각김밥과 편지를 먼저 주라고 하면서. 선숙은 그동안 아들과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아들 얘기를 들어주기보다는 자신의 원하는 방식대로 삶을 강요하기만 했던 자신을 깨닫고 삼각김밥 아래에 둘 편지를 통해 진정한 아들과의 소통을 기대하게 된다.


2. 느낀 점

이번 챕터의 등장인물들의 갈등 상황 속에서 삼각김밥이라는 소재를 사용한 것이 참 신선하게 다가온다. 왜 굳이 삼각김밥일까? 썰어진 긴 원통형 김밥도 편의점에서 파는데...

첫번째 삼각김밥의 등장은 짜몽과 선숙의 갈등 속에서 등장하며 무기로 쓰였고 용서의 도구로 쓰였고 화해의 감정을 만드는 역할로 쓰였다. 이렇게 세 가지의 역할로 쓰였고 이 사건의 연루된 등장인물 또한 세 사람이다.

두번째 삼각김밥의 등장은 선숙과 아들의 갈등 속에 재 등장한다. 이곳에서도 등장인물은 선숙, 아들, 그리고 독고 이렇게 세 사람이다. 그리고 삼각김밥도 이 갈등 속에서 게임의 친구로, 아들과의 갈등의 표현으로, 그리고 마지막은 소통의 도구로 이렇게 세가지 역할을 보여준다.

그래서 작가는 편의점의 다른 것보다 이 삼각김밥을 독특하게 소재화 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우리 인생은 계속되는 새로운 갈등의 연속을 살아가는 것 같다.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더 가까워지기도 하고 오히려 멀어지기도 한다. 문제는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등을 다루는 것이 용이하지 않고 서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사건 사고가 계속적으로 많아지는 것이 인터넷의 영향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서 요즘 외치는 것이 소통! 소통 좀 합시다! 인 것 같다. 정치권이나 교육계, 사회 전반적으로 소통을 하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데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오선숙 여사처럼 소통한답시고 아들에게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소통하는 것으로 잘 못 알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번 챕터는 어떻게 소통하는 것이 진정한 소통인지를 단편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소통은 자기주장으로 상대편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잘 들어주는 것인가? 이야기 속에서는 잘 들어주는 매개체로 삼각김밥이 등장한다. 삼각김밥은 짜몽이 훔칠만큼 먹기 좋아했던 것이고 선숙의 아들이 좋아하는 게임을 더욱 더 재미있게 만드는 '어떤 것'이다. 즉 상대의 말을 잘 들어준다는 것은 그 순간 나의 모든 관심과 집중은 상대편의 마음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진심으로 상대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정말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상대방이 되어 그것을 찾아줄 수 있기를 진정으로 간구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말을 잘 들어서 그것을 반박하려고 면밀하게 듣는 것이 절대 아니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이라면 또한 이렇게 소통한다면 어떠한 갈등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 더욱 더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3. 나의 적용

갈등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있었던 갈등의 예를 생각해 보자.

갈등의 예를 생각했다면 어떻게 그 갈등을 해결했는지 기억해 보자.

지금 그 갈등을 다시 겪는다면 어떻게 갈등을 해결할 것인지 생각해 보자. 예전의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오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좀 더 건강한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는가?


4. 실천 방법


성경적 관점과 크리스천의 관점으로 해석한 내용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아래 정진부 목사님의 블로그에서 좀 더 깊은 내용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정진부 목사님 post '불편한 편의점 - 삼각김밥의 용도'





Sunday, October 8, 2023

불편한 편의점 - 제이에스 오브 제이에스

 

1. 요약

시현은 여러개의 알바를 경험을 토대로 현재의 편의점 업무를 아주 훌륭하게 처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런 그녀에게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40대 중반의 제이에스 오브 제이에스이다. 이 인간은 참으로 고약하게 시현을 이리저리 맥을 못추게 하며 괴롭힌다. 아마도 시현같은 힘없고 빽없어 보이는 편의점 알바를 괴롭히는 것으로부터 삶의 즐거움을 얻는 것 같다. 

그런 시현에게 하나의 짐이 또 더해졌으니 바로 그 노숙자 독고씨가 편의점 직원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켜야 하는 것이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 왔던 시현은 편의점 알바가 그녀에겐 아주 딱 맞는 돈벌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알바를 지속하다보니 이젠 이 직업이 자신에게 오히려 맞는 천직으로 여겨지기까지 하던 터에 독고씨의 교육령이 사장님 지시로 떨어지게 되어 이 편의점 직업을 지키기 위한 소중한 사명감으로 임해야 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교육의 현실은 독고씨의 어눌하고 더듬거리는 말투와 느려터진 행동, 아직도 찌들어 있는 노숙자 냄새 등으로 인해 녹록하지가 않다. 거기다가 사장님의 동업가인 오여사의 독고씨에 대한 시비와 불평까지 받아내야 하므로 갈 길이 그리 평탄치 않게 보인다.

그러던 중 그 제이에스 오브 제이에스가 나타나 교육중인 독고씨를 시험하게 되는 위기의 상황을 맞게 된다. 일부러 어려운 담배 주문부터 비닐봉지로 시비를 거는 제이에스 오브 제이에스를 독고씨는 담담하게 받아 넘길 뿐만 아니라 새 비닐봉지 대신 독고씨의 꼬질한 에코백을 물건 주머니로 제공하는 등 오히려 통쾌한 반전을 선사한다. 결국 사내 기싸움에 완전히 꼬리를 내린 제이에스 오브 제이에스는 그 이후로는 편의점에 얼씬도 하지 않게 되었고, 독고씨는 독고씨대로 점점 편의점 직원으로 나무랄 데 없이 모든 일을 잘 소화하게 된다.

그런데 독고씨는 시현에게 가르치는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며 유튜브 영상을 만들 것을 제안하게 되고 그렇게 시작한 유튜브로 시현은 결국 다른 편의점에서 점장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된다.


2. 느낀 점

'사장이 직원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직원도 손님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역지사지의 한자성어가 생각난다. 글에서는 수직상하 관계만 언급했지만 어느 인간관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한자성어다. 인간의 죄성은 자신보다 좀 더 못한 사람을 대할 때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한국 모토로라에서 일할 때 중국 텐진에 공장이 있어서 두어번 출장을 갔었다. 처음 생산라인에 들어갔을 때 좀 뻘쭘하고 어리벙벙했으나 곧 내 업무에 적응을 하게 되었다. 그 곳에는 나보다 먼저 출장을 와서 일하고 있는 동료들도 있었고 그 중에는 거기 중국공장에 출장으로 잔뼈가 굵은 동료들도 있었다. 그런데 곧 나는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동료들이 한결같이 생산라인의 중국직원과 일하고 대화하면서 마음에 안들때나 농담으로 한국어로 상대를 무시하는 말과 욕을 한다는 점이었다. 소통은 영어나 중국어를 쓰면서 상대를 좀 까고 싶을 때 한국어로 그렇게 상스러운 말을 하는 것이었다. 상대직원은 그게 무슨뜻인지 모르니 그냥 혼잣말 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참 충격을 받았다. 그 전에 알고 지내던 직장 동료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직장 상사로부터 억눌림 당하던 그 스트레스를 상대 중국직원들에게 풀었던 것일까? 중국이 대부분은 못사는 사람이라서 인간적으로 깔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중국이 공산국가라 한국의 적대국으로 생각해서일까? 나는 그 직원들에게 상스러운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좀 지나 어느 시점부터 나도 그 중국직원들을 좀 하대하는 듯이 행동하게 되었다. 직장 동료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고 교정해 주지는 못할망정 나도 똑같이 그 행동에 동조를 하게 된 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큰 잘못을 한 것이었지만 결국 인간은 그 죄성으로 인해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 죄의 본성이 나를 뚫고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자명하게 보여주는 경험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나는 가끔 접하는 끔찍한 뉴스들 - 연쇄 살인마, 공공장소에서 총으로 난사 등 - 을 접할 때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라고 생각하거나 말하기 이전에 나도 그 범죄자들의 특수한 상황에 처했다면 나도 충분히 그 사람들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맘 속에 되새기게 된다. 인간의 첫 살인은 창세 몇 대 후손이나 몇 세기 후가 아닌 바로 아담의 첫째 아들이었으니까.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고전 15:34a)

성경 말씀에 깨어 있으라고 한 말씀이 어디 이 한 곳 뿐이겠는가. 죄가 나를 삼키려고 으르렁거리고 있는 지금 나는 말씀에 의지하여 깨어 있기를 기도한다.


3. 나의 적용

항상 깨어있기 위하여 어떤 방법이 있는지 구체적인 예시를 든다면? 




4. 실천방법

죄를 짓는 순간 나는 화로 사로잡혀 있거나 극도로 불안한 상태일 경우가 많을 것이므로 그 순간에 감정을 추스리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내가 죄라고 느끼는 순간 바로 예수님께 기도를 드리도록 노력하고 그것을 성령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할 것이다. 그 기도의 행위와 노력으로 그 순간 죄는 잠시 중단될 것이고 사탄은 당황하고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때 말씀과 기도의 융단폭격을 쏟아부어 죄를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 --- 하~ 가능한가?


성경적 관점과 크리스천의 관점으로 해석한 내용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아래 정진부 목사님의 블로그에서 좀 더 깊은 내용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정진부 목사님 post '불편한 편의점 - 제이에스 오브 제이에스'



 2024년 8월 3일 교회는 성도에게 전천후의 일을 하기를 원한다. 교회 오래 다녔으니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오래 다닌만큼 믿음도 커졌으니 이것 저것 모두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많은 일을 하기에 적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