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19, 2024

신명기 30장 1절-20절

1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4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적군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를 내리게 하시리니

8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9-10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1)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황주성 목사

1. 설교 내용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또는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는지 하는 것은 보이는 문제가 아니다.

단지 보이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서 나오는 결과,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 명령을 지키는 삶이다.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에 생명과 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께 생명과 복이 있다.

그러므로 보이는 어떤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를 잘 한다고 해서 그 자체가 생명과 복은 아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비슷할 수 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명령을 지켜 행하는 삶.

겉으로 드러나는 순종의 모습을 따라하는 삶, 열심히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삶은 자기자신을 속일 정도로 아주 비슷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드러나는 모습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항상 점검해야 한다.

신 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마음에 할례를 베푸실 때 그 할례가 무엇으로 이끌어지는지 잘 확인해야 한다.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 할례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신 후 가장 먼저 그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셨다.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이 돌이켜지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신자의 삶의 축소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역사하신다면 때로는 우리의 삶을 흔드신다면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을 더 편하게 하거나 우리의 형편을 더 낫게 해 주시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돌이켜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지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생명과 복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신자에게 있어서 참 중요한 지혜이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우리의 삶의 형편과 처지의 어떠함이나 또는 우리의 신앙생활과 사역의 어떠함보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마음을 쏟고 살아가야 한다.





2. 느낀 점




Monday, April 1, 2024

창조설계의 비밀(1) - 흰 가운을 입은 과학자 VS. 검은 가운을 입은 성직자



1. 요약

1974년 시카고 트리뷴의 신참기자였던 저자(Lee Strobel)는 웨스트버지니아 찰스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맡게 된다. 그 사건은 교과서에 불만을 품은 마을 사람들이 총과 폭탄으로 테러를 하고 집회를 열며,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며, 심지어 석탄광부들까지도 파업의 대열에 동참하여 지역 경제의 문제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교과서의 내용으로 인해 지역사회는 교과서를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는 등 갈등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 갈등의 주요 원인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의 내용이 기독교 가치관을 훼손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신앙의 가치관에 기반을 둔 목회자들과 가족들, 학부모들과 마을 사람들은 극도의 분노에 휩싸여 교과서를 반기독교적인 도서로 규정하고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비기독교인들이나 사회주의 운동가와 같은 진보주의 성향의 사람들은 이 교과서들이 바로 미국의 진정한 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우리는 모든 목소리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무신론자였던 기자는 단번에 좋은 기삿감이 될 것을 눈치채고 즉시 문제의 동네로 내려간다. 그렇게 찰스턴 시내에 도착한 저자는 교과서를 반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집회정보를 입수하고, 사진기자 챨리와 그 집회에 비밀리에 잠입하여 이 이상한 사건을 좀 더 정확하게 파헤쳐 보기로 한다.

그러나 이들의 비밀잠입은 집회 시작과 함께 바로 들통이 나고 성난 군중 앞으로 끌려나오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직면하지만 전도사인 듯한 남자의 도움으로 공정한 기사를 쓰겠다고 군중들과 약속하고는 인터뷰의 허락을 받게 된다.

집회의 내용은, 마을 사람들의 불만이 되는 교과서들 중 하나를 소개하며 반기독교적인 내용임을 강조하고 이러한 반기독교적인 교과서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명목으로 한 주 더 등교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지속적인 싸움을 위한 모금도 이어졌으며 싸움의 승리를 다짐하는 내용이었다.

집회가 끝난 후 저자는 "바이블벨트 카운티에서 벌어진 교과서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1면 머리기사를 실으며 소정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공평하고 균형있는 기사를 쓰려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기사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또한 저자는 그 집회를 통해 기독교는 모래에서 머리를 빼내지 않는 거대한 공룡의 모습이며, 하나님이 설 자리는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기독교인들은 왜 인정하지 못하는지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한다.

이렇듯 저자는 웨스트버지니아의 분쟁은 신앙이 스스로 자멸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결과라고 단정하고 있다. 철통같은 진화의 증거를 통해 예수의 기적은 미신에 불과하고, 궁극적으로 과학이 우주의 모든것을 설명하게 될 것이며 그날은 이미 다가와 있다고 믿고 있다.

아래는 저자가 진화론에서 직관적으로 알았던 내용을, 코넬 대학의 저명한 진화생물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윌리엄 프로바인"이 명백하게 밝혀 정리한 "다윈주의가 옳다면 피할 수 없는 5가지 결론에 도달한다"는 내용에서 그 5가지 결론을 서술한다.

1) 신이 존재하는 증거는 없다.

2) 사후 생명은 없다.

3) 윤리의 절대적 토대는 없다.

4) 삶의 궁극적 의미는 없다.

5)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의지란 없다.


2. 느낀 점 - 책의 챕터 마지막에 있는 질문들에 대한 답변으로 느낀 점을 서술하고자 한다.

1) 과거의 저자처럼 기독교에 적대적인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가? 그 사람이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의 태도 중에서 개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인가?

기독교인인 나에게 적대적으로 대하지는 않았지만 반기독교적인 지식과 진화론의 지식에 대해 해박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항상 책을 아주 많이 읽었었는데 비그리스도인 이었기도 했지만, 그의 독서와 탐구의 지식으로 기독교인들을 망신 주고 논쟁에서 이기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15년도 더 된 일이다. 그 친구와 진화론의 일부분으로 논쟁이 붙은 적이 있었다. 논쟁의 핵심은 인간이 진화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그 논리를 맞받아치기 위한 나의 질문은 '진화가 사실이라면 현재의 원숭이나 침팬치들도 긴 시간이 지나면 인간으로 진화할 수도 있느냐? 그리고 원숭이 또는 침팬치와 인간의 중간 정도의 종은 왜 현재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 그 친구는 다윈의 진화나무(생물계통수)를 언급하면서 "현재의 원숭이와 침팬치는 오래전 같은 조상에서 시작했지만 그 갈래가 갈라져 현재는 전혀 다른 종으로 분화되면서 더 이상 인간처럼 진화할 수 없고 원숭이와 침팬치의 종으로서 계속 진화를 계속해 나간다"라고 대답한 것 같다. 당시 나는 진화론을 그냥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수준 정도만 알고 있었고, 또한 성경에서 얘기하는 창조론조차도 무작정 믿는 정도이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수준이었으므로 (교회에서조차 창조론을 믿는 대상으로만 여겼지 자세하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 친구에게는 그 이상의 얘기를 꺼낼 수도 없이 무안하게 논쟁을 서둘러 마무리해야 했다.

저자의 생각과 관념 또한 내가 언급했던 그 친구와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고 여러 기적들을 일으켰다는 성경의 말씀을 그냥 허구와 종교적인 신념으로 정의해 버리고, 과학이야말로 증명된 진리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이 저자의 생각을 더욱 더 단단하게 해주는 것이 있다. 바로 기독교인들의 반응이다. 찰스턴의 마을 사람들도 '성경의 말씀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지문이 세상 도처에 있음을 절대 확신한다', '우리는 흙덩이에서 진화된 존재가 아니다' 등 진화론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신앙적 믿음을 성경을 앞세우며 진리라고 막연히 주장하기에 급급하다. 이러한 행동과 말이 진화론자들에게는 그저 흩어지는 구름을 잡는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보였을 것이다.


2) 당신은 기독교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가? 기독교의 신빙성에 대해 1(전혀 믿을 수 없다)부터 10(절대 믿을 수 있다)까지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이나 주겠는가? 당신의 견해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세월이 지나면서 당신의 견해는 달라졌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달라졌으며 그 계기는 무엇인가?

'기독교의 신빙성'이 무엇에 대한 신빙성을 의미하는지 자세한 내용이 질문에는 없다. 찰스턴 마을 사람들이 믿고 있는 그러한 막연한 신빙성을 의미하는지, 창조과정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없는 성경에 대한 신빙성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온 우주와 생명과 인간은 오로지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에 10인 절대 믿을 수 있다의 점수를 준다.

누가 창조하셨는가 하는 견해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하는 견해는 조금 달라졌다. 내가 어릴 때부터 젊을 때까지는 (한 30대 중반까지) 창조의 방법이 성경의 문자 그대로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제외한 우주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인간은 도자기 만들듯이 흙을 직접 하나님의 손으로 빚으셔서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내용을 그대로 믿었다. 좀 더 전문성있는 설명으로 종(species) 내부의 소진화(micro-evolution)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창1:25)

그런데 이러한 나의 생각은 조금 변화했다. 현재의 믿음은 종 안에서의 소진화는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여기서 소진화 즉 진화라고 얘기했지만 아직도 나의 소심한 입장은 진화라는 표현보다는 변화(change) 또는 변이(mutation)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 이유를 예를 들면, 애완견의 경우 오래전 들개로부터 사람들이 교배를 통해 예쁘게 만들고, 털이 부드럽게 또는 북실하게 만든 것처럼 사람의 기호에 맞게 다양한 형태의 강아지를 만들어내 왔다. 외모적인 면에서는 진화라고 해야 할 듯하나 대부분 알고 있듯이 순종의 경우 질병에 취약하고 대부분 유전병이 있다. 이런 면에서는 역진화라는 표현이 어울릴 듯 하다. 그렇게 변해온 애완견들은 여전히 같은 종으로서 어느 애완견과도 교배가 가능하고 심지어 같은 종인 들개와도 교배가 가능하다. 즉 개라는 종의 속성은 변하지 않았다. 개의 유전자 안에서 특정 유전자를 발달시켜 온 것이다. 그만큼 다른 유전자의 쇠퇴를 가져오게 된다. 그것이 필요한 유전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예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같은 단순한 세포들의 변이는 인간의 개입이 없이도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인간의 자연파괴가 한 몫을 했겠지만 인간에게 치명적인 세균으로 변이를 하여 세계인구를 조절했던 전례도 많이 있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진화라고 보기에는 좀 억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 박테리아의 진화를 내성을 가진 박테리아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내성을 가진 박테리아는 항생제의 출연에 의해 박테리아 스스로 자신의 시스템을 변형시킨 결과이지 진화의 결과는 아니다. 그리고 자연상태에서의 자연선택은 내성을 가진 균주를 제거하는 경향으로 작동하지만, 내성을 가진 박테리아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그만큼 항생제를 많이 만들어낸 결과로 항생제가 많이 있는 환경에서 살아남아 선택되는 것이다.)


3) 기독교는 현대 과학 앞에서 악화되었는가 강화되었는가? 그런 평가를 내린 근거는 무엇인가?

점점 악화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아래 내가 이해한 근거에 대해 기술해본다.

- 교회 내에서 진화와 창조에 대해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여전히 지지하므로, 약간의 색다른 의견조차 이단으로 정죄될 수 있는 두려움으로 인해 활발히 개진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진화의 내용에 대해 교회가 합리적인 대답을 해 주지 못한다.

- 진화론이 1800년 중반(1859년 종의 기원)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1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는 반면, 창조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1960년대부터 시작하여 이제 60년이 조금 넘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 교회 또는 기독교계 내부에서조차 창조의 방법에 대해 진화론을 일부 또는 상당량 수용하는 등의 일관된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 현대에는 과학은 진화론이고 무신론의 증거가 된다고 굳게 믿는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는 그동안 기독교가 과학을 버리고 부정함으로써 신앙을 더욱 강조하려는 이른바 맹신을 강요한 탓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교회의 목사들이 권위를 강조하여 신자들의 궁금증을 믿음이 부족하다는 명목으로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결국 맹신과 순응하는 신자들만을 양성한 결과이다. 이렇듯 과학의 이해와 지적인 토대의 결여로 무신론자의 공격에 쉽사리 무너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것은 무신론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하나씩 발견하고 그 창조과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과학으로 인해 오히려 인간은 창조자 하나님께 겸손해질 수 있고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과학은 하나님께서 하나의 도구로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선물이자 능력인 것인데, 이것을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등한시해 온 기독교가 과학은 무신론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신학자와 목사의 지적 백그라운드도 과학의 무신론에 한 몫 했다고 생각한다.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15, 16세기 위대한 과학자들은 신학자의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위대한 수학자 파스칼,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이 그랬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신학은 과학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다윈시대가 도래한 18세기경부터가 아니었을까? 어쨌든 20세기 이후에는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들보다 인문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좀 더 목회자나 성경학자가 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아 성경을 인문적으로 해석하는 시도와 경험은 오래된 반면 자연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극히 드물었다고 생각된다. 


4) 코넬 대학의 역사학, 생물학 교수인 윌리엄 프로바인은 "다윈주의가 옳다면 다섯가지 결론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가 내린 결론 중 당신에게 가장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윌리엄 프로바인의 5가지 결론은 다윈주의가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주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내린 첫번째 결론인 "신이 존재하는 증거는 없다"가 나머지 4가지 결론을 이끌고 있으며 명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신의 존재의 부정은 결국 우주와 생명은 "우연"이라는 사건을 통해 발생되고 진행되어진다는 것이므로 우연으로부터 시작한 사건의 진행은 목적이 없다. 물질로만 모든 것이 설명되어야 하므로 사후세계나 영적인 세계는 당연히 존재해서는 안된다. 물질이나 생명은 우연으로 발생하고 진행되지만 자연선택의 원리로 상황 속에서 강한 자만이 살아남아야 멸종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다. 이 자연선택의 원리 속에서 유기체는 점차 강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했으며 세포는 복잡해지고 점점 늘어나서 인간으로까지 형태가 발전하게 되었다. 복잡해지는 만큼 처리해야 할 정보량은 점차 늘어나게 되므로 그 정보량을 처리해야 할 "뇌"라는 조직이 발생이 되었고 그 뇌 자체도 점점 복잡하게 되어 뇌를 구성하는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구성이 유전자, 호르몬, 뉴런 등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정보를 처리하고 그에 따른 명령체계를 구성한다. 즉 동물이나 인간이 생각하고 반응하는 모든 것들이 뇌 안의 물리화학적인 방법으로 정보와 명령을 처리하는 결과라는 것이다. 고도로 발달한 지능일수록 집단 또는 사회를 이루어서 살아가는 것이 개인 혼자 살아가는 것보다 강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이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도록 질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사회 속에서 종족의 계승과 번식을 더 원활하게 하기 위한 안정적인 보호장치가 "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윤리는 뇌의 유전자 속에 상주하여 자손에게 계승된다. 따라서 인간의 선택 또한 뇌 안에서 유전자, 호르몬 등의 물리적 화학적 작용을 통해 일종의 알고리즘적으로 동작하며 자신과 사회를 보호하고 발전되도록 작용하는 것이다. 결국 진화 알고리즘이 유전자에 코딩되어 생명을 지속하고 종족을 이어가기 위해 선택이라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지 자유 의지의 반영이 아니다.